불편할 수도 있다고? 가족 호칭 누군가는
아가씨, 도련님? 이거 나만 불편해?
전처와 이혼한 지 2년 만에 두 아이를 데리고 현재의 아내를 만나 재혼한 나는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였다. 또다시 결혼생활에 실패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내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자 가정 내에서 상당한 성차별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명절 때마다 시댁에서 줄곧 부엌일을 하던 아내가 그 다음 주에야 집에 갈 수 있었다. 내 동생에게 도련님이라는 아내를 보고 혹시 이건 봉건주의적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앞장서서 이런 관행(?)을 바꾸려는 시도는 해본 적이 없다. 미안한 마음은 있었지만 결국 방관자에 그쳤을 뿐이다. 최근 남녀평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라 다행스럽기도 하다. 가족 호칭이 바뀐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많은 관습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지만 사용하는 언어가 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면 분명 의미 있는 시도가 되지 않을까.
나이 80세인데 아들이 우선이다, 며느리는 뒷전이라는 전근대적 친구를 만나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젠더, 여성의 권리 신장을 전적으로 응원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지만 작금의 흐름을 보면 다소 과격하고 극단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마치 천하의 원수를 갚듯 남자를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람들을 보면 저래서야 진정한 성평등이 실현되는 것일까. 서로 우호적인 관계로 바랄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시댁과 처가, 딸과 도련님이라는 가족 호칭을 새롭게 바꾸자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성평등의 일환인데 용어를 바꾸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의 인식 변화라고 생각한다. 진정한 성 평등 실현을 위해서는 점진적으로, 그리고 다수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방법을 택할 것을 권한다.
아가씨, 도련님이라는 가족 호칭으로 종이 양반 집안의 자제들을 높여 부르는 것 같다는데. 나도 아주머니를 '아가씨'라고 불렀지만 나는 거기에 문제의식을 가져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누구누구로 묶는 서양에 비해 우리나라의 섬세하고 고유한 호칭 문화가 격조가 높아 멋지다고 생각했다. 그저 아름다운 전통으로 여겨질 만한 것을 굳이 공론화해 오랫동안 유지해온 언어를 바꿔 긁어 부스럼 같은 사회적 논쟁을 일으키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솔직히 잘 모르겠어. 이러니 남녀평등 문제까지 거론되는 모양인데 요즘처럼 되레 여당이 훨씬 강하다는 생각도 든다. 적어도 우리 집에서는 그렇다. 올 명절만 해도 그렇다. 아들 내외에게 나는 혼자 지내도 좋으니 너희들끼리 여행이나 다녀오라고 했지만 며느리 말로는 친정이 제사를 지내니 명절 연휴를 친정에 다 보낸다고 한다. 내심 '뜨악'했지만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에게 시집가면 그 집 귀신이 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던 나는 모진 시어머니 밑에서 고추보다 더 고된 시집살이를 참았다. 툭하면 친정을 외면하는 것도 무심했지만 내 딸이 소중한 줄 알면서도 며느리의 소중한 줄 모르는 시어머니에게 화를 많이 냈지만 나처럼 친정집처럼 처가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면 딸 스님 시댁 뒷바라지라는 존댓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까. 주관이 뚜렷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운 딸은 자기 자식들을 두고 친할머니, 외할머니를 부산 할머니, 세종 할머니로 구분하게 하고, 자기 시누이를 아예 아가씨가 아닌 아줌마로 부르는 식으로 나름대로 꾀를 부리는 모양이다. 너 참 잘났구나 하면서도 적어도 나처럼 바보처럼 살 수는 없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다. 국가가 나서서 이런 모호한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하는 걸 보면 그래도 한국이 선진국이긴 한 것 같다.
기획 장혜정 기자 편집 우정민 수습기자 사진 네이버 영화